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단 편집) === [[독일 국방군]] === 일본과 비슷한 상황인 다른 나라를 들자면 [[나치 독일]]을 들 수 있겠다. 이쪽은 공군VS 육해군, 국방군 전체VS 친위대라는 막장 대립이 벌어졌다. 당시 히틀러의 심복이자 [[나치당]]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 대전 에이스 파일럿 출신으로 항공부 장관 자리에 있었고, 강력한 공군을 건설하여 전쟁 초반만 하더라도 평판이 좋은 편이었지만, 자기 분야에 대한 애호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국가 소유인 [[공군|루프트바페]]를 멋대로 주무르며 편애하는 한편, 육군이나 해군에 항공기 비스무레한 거만 보여도 자기 관할이라고 지랄지랄을 하면서 훼방을 놓아서 악명이 높았다. 오죽하면 [[크릭스마리네]]의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이 사임하면서 히틀러에게 '''"[[지못미|괴링의 손으로부터 해군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했겠는가? 또한 괴링이 '''[[함재기]]'''는 항공기이니 공군 소속이어야 한다고 우겨서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유명한 일화. 괴링이 사사건건 딴지거느라 늦어진 이유도 있지만, 독일 해군 수상함대의 졸렬함에 매우 빡친 히틀러가 직접 그라프 제펠린 건조 중지 명령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95% 정도에서 건조를 정지하였다. 물론 영국에 비한다면 매우 빈약했던 독일 수상 함대의 상태에선 이 정도의 활동도 제법 용한 셈이다. 물론 영국 해군의 전력에 비하면 훨씬 약한 전력만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함대의 보존을 중시하는 건 이해할 수 있으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도 [[바렌츠 해 해전|패배한 경우]]는''' 졸전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원래 육군 소속이었던 공수부대도 항공기로 이동한다는 이유로 공군으로 뺏어오는 것도 모자라 전차와 장갑차까지 다 뺏어서 공군 소속 기갑사단을 만드는 등 육군의 영역을 대놓고 침범하기까지 했으니 그 때쯤 되면 육군이 괴링과 공군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도 그나마 공수부대와 헤르만 괴링기갑사단은 잘 싸워서 육군이 눈감아 줬지만 이놈의 공군야전사단은 훈련도 제대로 안받고 소련에게 무기를 가져다 바치는 삽질만 벌여 육군의 경멸을 샀다. 한술 더 떠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완전포위된 제6군에 독일 공군이 그토록 성공을 호언장담한 공중수송작전을[* 참모총장이었던 한스 예쇼네크(Hans Jeschonnek)가 단기간이면 가능하다고 했고 괴링이 이를 보증하기까지 했다.] 실시하면서 육군 보급장교가 적재된 물자의 품목을 확인하는 것을 공군이 거부하여, 안 그래도 보급품은 부족하고 일일수송량도 제한되어 있는 와중에 전혀 쓸데없는 물자[* 예를 들어 전투나 생존에 필요없는 '''[[콘돔]]'''이 비행기 가득 실려오기도 했다.]를 전달하는 삽질을 하기도 했다. 또한 육군과 공군 방공부대사이에선 전지전능한 88이라고 불리던 88mm 대공포 사용문제로 자주 다투었는데 T 34와 KV1, KV2, 셔먼, 마틸다2에 대항할 마땅한 대전차포가 많지 않았던 육군은 88mm 대공포를 내어달라고 징징거렸고 공군은 육군이 본 목적이 아닌곳에 가져가서 온갖 마개조하는것에 대해 좋게 보지 않았다. 노르망디 전역의 캉전투 당시 영국군의 굿우드 작전에 참가한 기갑부대를 떡실신시킨 공군 88mm 대공포대의 참가 증언조차 갈리는데 공군 방공포대 측은 몰려오는 연합군에 맞서 자발적으로 참가했다고 보고한 방면 해당 작전 구역을 담당했던 제21기갑사단 한스 폰 루크 중령은 방공포대원들이 말을 안들어서 온갖 난리를 치고 나서야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말하면 이건 괴링 개인의 잘못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해군이랑 공군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다. 전함 티르피츠의 격침의 핵심 원인은 해군이 티르피츠의 위치가 기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군에게 티르피츠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군은 영국이 공습했을 때 공군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해군이 티르피치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던 탓에 공군은 티르피츠가 어느 구석에 처박혀있는지도 몰라서 예전 정박지로 날라가는 등 삽질만 했고, 결국 영국 공군의 폭격기들이 티르피츠를 격침시켰다.[* 덧붙여 당시 해당 부대를 지휘하던 지휘관은 모든 책임을 덤터기 썼다.] 바다사자 작전의 경우에도 육군은 해군의 상황도 생각하지 않고 동시다발적인 상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해군은 자신들의 전력으로 터무니없는 요구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에 반발했다. 물론 이 경우는 바다사자 작전 자체가 취소되면서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각군 사령부는 귀족의식 때문에 국방군 최고사령부를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히틀러가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도 종종 발생했다. 게다가 점입가경으로 친위대 국가지도자 힘러까지 끼는데 무장친위대를 계속 확대해가며 국방군 전체와 마찰을 빚었고 히틀러암살미수 사건이후엔 아예 국방군 내부일에 직접 관여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 [[폴란드]], [[프랑스]] 같은 국가를 빠른 속도로 함락시킬 때는 육군과 공군이 서로 협조를 잘 했고 동부전선에서 초반에는 [[크렘린]] 궁전이 보일 정도로 진격이 가능했었다. 스탈린그라드 이전에 이미 소규모의 고립된 육군이 공군의 공중 지원으로 위기를 벗어난 적도 있다. [[아르덴 대공세]]에서도 공군이 보텐플라테 작전을 수행하여 육군의 진격을 도운 것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정작 정보 전달을 제대로 안 해서 1/4이 자국의 대공포화에 털리기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이 외에도 [[켈베로스 작전]]에서는 크릭스마리네와 루프트바페 간에 서로 연락장교를 파견하는 등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져서 프랑스에 있던 함대를 영국 해군과 공군의 앞마당인 도버 해협을 지나 무사히 북해로 이동시켰다. 나치 독일 시절 독일 국방군 상부에서는 예산 배분, 지휘권 등을 가지고 다른 국가에 비해서 심하게 대립했고 이것이 일선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나 '''최소한''' 서로를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하인리히 힘러]]가 지휘하는 [[무장 친위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친위대는 적어도 1942년까진 국방군과 약속했던 국방군 병력의 10%를 유지한다는 합의를 준수했으며 루프트바페나 무장친위대조차 어쨌든 지상전을 수행할 때는 육군의 [[집단군]]에 소속되어 '''육군 지휘관의 명령을 들으며 전쟁을 수행했고''', 심지어 이탈리아 북부 방위에서는 공군상급대장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이 방위 사령관에 임명되자 휘하 육군 부대는 군소리 없이 그의 지휘를 따라 성공적으로 연합군의 북상을 저지하였으니 육군과 해군이 아예 따로 노는 일본군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